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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아르헤리치: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 (현암사)Diary/2023 2023. 1. 12. 20:19
아빠가 예전에 (아마도 2010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내한 공연 표를 사주셔서 다녀왔는데 아쉽게도 그때는 너무 어려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즐길 여력이 없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른 채 머리숱이 엄청 많은 할머니의 연주를 그냥 멍하니 감상했다. 그렇지만 그 흰 장발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했던 것만은 기억난다. 그렇게 잊고 살다가 얼마 전 출근길에 BWV 911 연주를 애플 뮤직에서 우연히 듣게 됐고, 힘 있는 연주에 반해 더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찰나, 도서관 서가에 꽂힌 평전을 발견해 무작정 빌렸는데 연주만큼 대단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녀의 일대기가 흥미로워 이틀 만에 다 읽었다.
평전은 마르타를 향한 맹목적인 찬양보다는, 그녀가 주변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떻게 재능을 키워나갔는지 서술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녀의 커리어를 위한 가족들의 헌신도 책에 잘 나와있다. 특히 어머니 후아니타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어쩌면 마르타보다 더 대단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마르타는 후아니타의 넓은 오지랖과 따뜻한 마음씨를 물려받은 듯하다. 나중에는 집을 사서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방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찾아오는 젊은이들의 끝없는 요구에 지친 나머지 나중에는 노인들에게 더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위대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흥미도 없고, 믿기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도 피아노와 많은 시간을 보낸 탓에 책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우고, 성당에서 오랫동안 반주자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이를 통한 경험을 통해 받은 영향도 다시 생각해 봤다. 너무나도 연주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라 부모님에 의해 학원에 보내졌기 때문에 시작했는데,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길고, 한 곡을 완주했을 때 느끼는 정복감, 그랜드 피아노의 타건감과 발로 페달을 밟아 소리를 맘대로 조절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재밌게 배웠다. 생각해 보니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본의 아니게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서 지냈다. 책에서 마르타의 주위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바닷가재에 목줄을 매달아 산책시키는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다지 놀랍다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독특한 사고의 사람들을 많이 접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마르타만큼 세계적인 연주자의 반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아마추어 연주자로서 느낄 만한 것들은 다 느끼지 않았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