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LPT N1 합격과 그 동안 품었던 소회
1월 중순부터 거의 매일 my JLPT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작년 12월에 세타가야구 니혼대학 캠퍼스에서 응시한 N1 결과가 나왔는지 확인했다. 혹시 몰라 한국 JLPT 사이트에도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21일에 예정 됐던 시험 결과 발표일의 연기 공지가 한국 홈페이지만 뜬 점은 좀 신기했다. 찾아보니 일본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수험생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이 때문에 연기 됐을 듯하다. JLPT 시험을 2년 연속 공부하다 보니 좀 질린 면도 있어서, 불합격 시 재도전을 언젠가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N2 결과 나올 때보다 이번이 더 긴장됐다.
JLPT와의 인연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취미로 일본어 기초~중급 레벨을 막 마친 상태라 그다음에 뭘 할지 고민이 됐는데 마침 JLPT 시험을 붙으면 회사에서 소정의 포상금(...)을 준다고 해서 예상치 못한 용돈 벌이에 눈이 멀어 3급을 한 달 남짓 벼락치기로 공부하고 턱걸이 수준으로 붙었다. 포상금을 받고 난 뒤로는 딱히 더 배울 의욕이 생기지 않아 한동안 손을 놨다. 2021년에 일본 도쿄에 있는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고,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비자 발급이 안돼 한국에서 원격으로 근무를 하며 다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운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전에 회화반 공부를 가르치셨던 원어민 선생님이 고급반 학생을 모집 중이라고 라인으로 메시지를 보내셨는데 선생님의 야무진 수업 리딩 실력과 일본어를 공부할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으로 인한 만족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원격으로 공부를 재개했다. 그렇게 해서 우선 원래 다니던 일본어 학원의 고급 레벨을 마쳤다. (사실 책을 이미 사뒀으니 돈이 아깝다는 감정도 한몫했다.)
도쿄에 이사 가서는 한동안 영어를 중심으로 생활했는데, 미묘한 감정이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영미권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나에게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사람들과 일본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 '영미권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과 '일본에서' 부분이 상당히 치명적이다. 이들과 어울리기 전에는 내가 무조건 새로운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편인 줄 알았다. 그것은 나에 대한 오해였다. 이게 일정 부분 이상 노출이 되면 피곤해지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타문화 수용 한계에 다다른 적 없이 한국에서 편하게 생활했던 거다. 수용 가능한 한계 이상을 넘어서게 된다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한국어 콘텐츠만 접하고 싶어 진다. 그 나라의 주 언어와 다른 언어권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해외 유학파 아이들과 어울리면 그런 느낌을 받았다. 포토샵 레이어 기능처럼, 마치 두 레이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나는 유학파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러한 행세를 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흥미가 있어서 어쩌다가 두 레이어 사이에 낀 외국어 학습자일 뿐이다. 때문에 일단 여기서는 일본어를 일상 회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시간을 좀 더 충실하게 보내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곳이 영어권 국가가 아니라면, 외국인 친구들 중에서도 영어와 더불어 그 나라의 언어(일본어, 중국어 등등)가 둘 다 어느 정도 가능하거나, 아예 그 나라의 언어만 가능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생활 적응 측면에서 더 도움이 된다. 타국에서 사는 이상 타인에게 좀 더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영어만 가능한 친구들인 경우 이 친구들을 신경 쓰느라 내 쪽에서 오히려 진이 빠지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몸을 사리게 됐다. 내 코가 석자인데 왜 나는 일본어로 다른 외국 친구들의 인터넷 해지를 도와주고, 메뉴판을 일일이 읽어주고 있는 것인가... 발전적인 성향의 친구들이라면 기꺼이 도움을 주겠지만 일방적인 기부는 이제 꺼려진다.
원래 타인과 나 사이에 주고받는 도움에 대한 균형을 인지하지 않고 오지랖 넓게 살았지만 외국 살이를 하니 이런 것들이 너무 잘 보이고, 에너지의 한계가 더 잘 느껴져 함부로 힘을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확고해지는 중이다.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쓰기로! 그리고 일본어가 좀 더 자연스러워지면 일본의 여러 문화와 기술을 원어로 습득하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일본에서 영어로 받는 서비스는 가격이 더 비싸거나, 일본어보다 빈약한 정보가 제공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서서히 영미권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에 일본어 공부에 시간을 좀 더 할애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JLPT N1을 목표로 공부하는 것은 자립적인 일본 생활의 단단한 바탕이 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생겼고, 2년 동안 일본어 공부 의욕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 공교육에서 지정한 제1외국어와 제2외국어를 나 개인의 생존을 위해 임의로 스와핑 했다. 특정 국가에 산다면 그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사는 것이 그 나라에 사는 예의(?)라는 이상한 생각에 심취해 2024년에는 N2를, 2025년에는 N1 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회사 생활과 병행하면서 하는 공부라 많은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고, 두 번 다 일단 12월에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정하고, 9월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 문법과 독해 수업을 학원에서 대면으로 들었다. 수업 전에 근처 카페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복습을 했다.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는 느슨하게 학원에서 주는 전 영역 문제만 풀면서 시험에 대한 감을 끌어올리고, 10월 말부터 11월에 바싹 달리며 암기에 시간을 너무 쏟기보다 일단 문제를 많이 풀고 틀리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는 식으로 공부했다. N2는 한국에서 사 온 파고다 교재를 보고 N1은 전의 회사 후배가 도쿄 여행을 오면서 사다 준 다락원 교재를 봤는데, 두 권 모두 내용이 충실해 만족스러웠다. 일본 출판사에서 나온 교재도 같이 봤는데, 깊이는 일본 교재가 좀 더 있었고, 한국인 관점에서 일본어 뉘앙스를 익히고 문제를 많이 풀어보려면 한국 교재가 더 좋다. 웃긴 게 예전에는 암기 위주의 한국식 교육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일단 머릿속에 때려 박아야 하는 어휘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언어 시험에는 한국식 언어 교육이 참 잘 듣는다. 회화 실력 향상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회화를 잘하려면 한국식 보다는 영미권 아이들이 브레인스토밍 하는 것처럼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엄청나게 떠들게 한 다음에 피드백을 주는 방식이 좋은 것 같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방법을 쓰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서론이 굉장히 길었는데, 결론은 N1 합격이다. 180점 만점에 130점 내외의 점수로. 모든 영역이 균등하게 40점 안팎이다. 일단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으로!